페르난도 보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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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2023년 9월 15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독창적인 '보테리스모' 스타일로 유명하며, 과장된 비례의 인물 묘사가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등 다양하며, 특히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를 다룬 연작으로 사회 참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보테로는 개인 소장품을 기증하여 보테로 미술관을 설립하고, 콜롬비아와 세계 각지에서 전시회를 열어 예술적 영향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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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보테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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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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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페르난도 보테로 앙굴로 |
출생일 | 1932년 4월 19일 |
출생지 | 메데진, 콜롬비아 |
사망일 | 2023년 9월 15일 |
사망지 | 몬테카를로, 모나코 |
배우자 | (1955년 결혼, 1960년 이혼) 세실리아 잠브라노 (1964년 결혼, 1975년 이혼) 소피아 바리 (1978년 결혼, 2023년 5월 5일 사망) |
자녀 | 리나, 후안 카를로스, 페르난도, 페드로 (1974년 사망) |
직업 | 화가 조각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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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작품 | |
대표작 | "모나리자, 12세" (1959년) "교황 레오 10세 (라파엘로 이후)" (1964년) "대통령 가족" (1967년) "무용수들" (1987년)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 (1999년) "라 팔로마 데 라 파스" (2016년) |
소속 | |
수상 | |
영향 |
2. 생애
페르난도 보테로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인 글로리아 세아는 콜롬비아 문화원장을 지냈으며, 슬하에 페르난도, 리나, 후안 카를로스 등 세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1960년에 이혼했다. 1964년 보테로는 세실리아 잠브라노와 함께 살기 시작하여 아들 페드로를 낳았으나, 페드로는 1974년 스페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보테로는 이 사고로 오른쪽 새끼손가락 뼈마디를 잃는 부상을 입었다. 보테로와 잠브라노는 1975년에 헤어졌다.
보테로는 고향 메데인이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고향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에스코바르 사후 그의 그림 두 점이 에스코바르 소유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그린 그림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그의 조각상 《평화의 새》가 폭탄 공격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보테로의 두 번째 아내는 그리스 출신 예술가 소피아 바리였으며, 2023년 5월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몬테카를로 등지에서 함께 거주했다. 보테로는 2023년 9월 15일 모나코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32~1951)
페르난도 보테로는 1932년 4월 19일 메데인에서 태어났다.[13] 아버지 다비드 보테로[14]는 말을 타고 다니는 영업사원이었는데, 보테로가 4살 때 세상을 떠났다.[16] 어머니 플로라 앙굴로[15]는 재봉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16] 보테로의 삼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6]보테로는 성장하면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식민지 시대 교회와 메데인의 도시 생활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박물관이나 다른 문화 기관에서 전시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다.[17]
보테로는 아테네오 안티오케뇨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장학금으로 예수회 볼리바르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18] 1944년, 삼촌은 그를 2년 동안 투우사 학교에 보냈다.[19] 그의 초기 그림 중 일부는 투우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한 상인이 가게 창문에 그림을 전시하도록 허락해 준 덕분에 첫 번째 그림을 2 페소에 팔았다.[20][21] 2000년 11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림을 팔아 얻은 돈을 잃어버려서 형제들이 자신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22] 그는 누드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로마 가톨릭 교육과 문제가 생겼고,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을 옹호하는 에세이를 쓴 후 학교에서 퇴학당했다.[21] 1948년, 16세에 엘 콜롬비아노의 일요 부록에 처음으로 삽화를 게재했고, 이 돈으로 안티오키아의 리세오 데 마리니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23]
보테로는 바로크 양식 교회가 남아있는 콜롬비아 메데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는 미술관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자산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자랐다. 이러한 콜롬비아 시대의 경험은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Colombian children go to church and see the Virgin and Child. It is very beautiful and perfect. In South America, perfection like yours is a very large part of beauty. Latin American sculpture is more colorful, smoother, and more like 도자기 than Spanish wood sculpture. So, in contrast to Europe or North America, I connect the concept of art and beauty from a very young age. I grew up with the ideal that art is beauty. I have been challenged throughout my life to create art that is beauty, to find all the elements that make visual perfection. If you have a background like mine, you will not be ruined by art. Because I have never actually seen it. If you were born in Paris, you can see art everywhere. So by the time you make your own art, you will be ruined. You will be fed up with that beauty and look for something else. But I was completely different. I was not tired of beauty. I was hungry for it.영어
위의 인용문은 페터 슈테판(Peter Stepan)이 1986년 5월 8일 뮌헨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베르너 슈피스(Werner Spies)가 엮은 "페르난도 보테로의 회화와 드로잉(Fernando Botero: Paintings and Drawings)" (뮌헨: Prestel-Verlag, 1992)에 수록되어 있다.
2. 2. 유럽 유학과 초기 활동 (1952~1960)
1952년, 보테로는 갤러리 수입을 가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27]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로 이동하여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28]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며 고야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했고,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복사본을 팔기도 했다.[28][29]1953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들을 연구했으며,[24]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다.[24] 1958년, 제9회 콜롬비아 예술가 살롱에서 우승했다.[30]
2. 3. 뉴욕 활동과 국제적 명성 (1961~1972)
1960년에 보테로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파리에 정착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24] 1961년, 보테로는 세실리아 잠브라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아들 페드로가 스페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보테로와 잠브라노는 1975년에 헤어졌다.[31]보테로는 1964년경부터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31] 청동 조각을 만들 재정이 부족했기에 아크릴 수지와 톱밥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1964년에 만든 ''작은 머리(주교)''인데, 매우 사실적으로 칠해졌으나 재료가 너무 다공성이어서 이 방법은 포기했다.[32]
2. 4. 파리 정착과 전성기 (1973~2023)
1953년 보테로는 파리로 이주하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그곳의 작품들을 연구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피렌체에서 살면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다.[24] 말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지만, 1년에 한 달은 고향인 메데인에서 보냈다. 그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그의 작품은 수백만 달러에 판매되었다.[44]1964년경, 보테로는 조각을 만들기 위한 첫 시도를 했다.[31] 청동으로 작업할 재정적 제약 때문에 아크릴 수지와 톱밥으로 조각품을 만들었으나, 재료가 너무 다공성이어서 이 방법을 포기했다.[32]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조각으로 돌아왔고, 1977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처음으로 그의 특징적인 청동 조각을 전시했다.[31]
1995년 6월 10일, 그의 아들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가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메데인의 산 안토니오 광장에 전시된 보테로의 청동 조각상 중 하나 아래에 10kg의 다이너마이트가 든 폭탄이 설치되었다. 이 폭발로 2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33] 충격을 받은 보테로는 훼손된 조각상을 "국가의 어리석음과 범죄 행위에 대한 기념물"로 그 자리에 남겨두기로 결정하고, 그 옆에 온전한 복제품을 기증했다.[34][35]
2004년, 보테로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콜롬비아의 폭력 사태를 다룬 27점의 드로잉과 23점의 그림 시리즈를 전시했다. 그는 이 작품들을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곳에서 처음 전시되었다.[36]

2005년, 보테로는 이라크 전쟁 중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군인들의 포로 학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비행기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보테로는 이 개념을 탐구하고[37] "독을 씻어내기" 위해[44] 85점 이상의 그림과 100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이 시리즈는 2007년 워싱턴 D.C.를 포함한 두 곳의 미국에서 전시되었다. 보테로는 이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고 박물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38] 2009년, 버클리 미술관 및 태평양 영화 보관소는 (예술가로부터 기증받아)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의 56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소장했으며, 이는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39]
2006년, 14개월 이상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에 전념한 후, 보테로는 가족과 모성애와 같은 초기 삶의 주제로 돌아갔다. 2008년에는 20점의 유화와 수채화 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서커스'' 컬렉션을 전시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 보테로는 다른 주제를 다룰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44]
보테로는 2023년 9월 15일 모나코에서 91세의 나이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 5. 사망
페르난도 보테로는 2023년 9월 15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예술 세계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메데진 출신으로, 어린 시절 미술관 같은 전통적인 예술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바로크 양식 교회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는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에서 회화를 배우고 뉴욕으로 이주한 후, 1973년부터 조각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개인 소장품 208점을 보테로 박물관에 기증했다.
2022년에는 분카무라 더 뮤지엄, 나고야 시립 미술관, 교토 시립 교세라 미술관에서 "보테로展 풍만한 마법"이 개최되었다.
3. 1. 보테리스모: 독창적 스타일
보테로는 정물화와 풍경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작품을 그렸지만, 상황 묘사를 통한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의 그림과 조각은 비례적으로 과장된, 즉 "뚱뚱한" 인물이라는 특징으로 통일되는데, 이는 그가 한때 언급했던 내용이다.[44]보테로는 비평가들이 종종 "큰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인물들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예술가는 이유도 모른 채 특정한 형태에 끌린다. 당신은 직관적으로 입장을 취하고, 나중에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뿐이다.[45]
''만돌린이 있는 정물''은 확대된 인물을 그린 보테로 화풍 발달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46] 2000년 11월 인터뷰에서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만돌린을 그리고 있었는데, 사운드홀을 아주 작게 만들어서 만돌린이 거대하게 보이게 되었다. 세부 사항을 작게 만들면 형태가 기념비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그림 속 인물들의 눈, 입은 모두 작고 외부 형태는 거대하다.[47]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보테로는 워싱턴 D.C.와 멕시코시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그림을 거의 다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 그의 명성은 1961년 뉴욕 현대 미술관이 그의 그림 ''열두 살의 모나리자''를 소장한 후에 향상되었다.[46]
보테로는 1년에 단 한 달만 콜롬비아에서 보냈지만, 미술계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콜롬비아적인 예술가"로 여겼다.[44]
3. 2. 주제 의식
보테로의 작품은 정물화와 풍경화도 있지만, 상황 묘사를 통한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그림과 조각은 비례적으로 과장된, 즉 "뚱뚱한" 인물이라는 특징으로 통일된다.[44]보테로는 비평가들이 종종 "큰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인물들을 사용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예술가는 이유도 모른 채 특정한 형태에 끌린다. 당신은 직관적으로 입장을 취하고, 나중에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뿐이다.[45]
보테로의 작품 ''만돌린이 있는 정물''은 확대된 인물을 그린 그의 화풍 발달의 시작을 알렸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46] 2000년 11월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만돌린을 그리고 있었는데, 사운드홀을 아주 작게 만들어서 만돌린이 거대하게 보이게 되었다. 세부 사항을 작게 만들면 형태가 기념비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그림 속 인물들의 눈, 입은 모두 작고 외부 형태는 거대하다.[47]
그는 1년에 단 한 달만 콜롬비아에서 보냈지만, 미술계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콜롬비아적인 예술가"로 여겼다.[44] 바로크 양식 교회가 남아있는 콜롬비아 메데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는 미술관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자산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자랐다. 이 점을 포함하여 콜롬비아 시대는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콜롬비아 아이들은 교회에 가면 성모자를 봅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완벽합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자기와 같은 완벽함이 아름다움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라틴 아메리카 조각은 스페인 나무 조각보다 더 다색적이고 더 매끄럽고 도자기 같습니다. 그래서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미의 개념을 연결합니다. 저는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이상과 함께 자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전 생애, 시각적인 완벽함을 만드는 모든 요소를 찾기 위해, 아름다움인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에 도전해 왔습니다. 당신이 저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미술에 의해 망가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것을 본 적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파리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어디에서나 예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예술을 만들어내기까지, 당신은 망가져 버릴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아름다움에 질려서 다른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아름다움에 질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2004년, 1999년부터 2004년에 걸쳐 제작한, 콜롬비아 내전의 장면을 그린 23점의 유화와 27점의 데생을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다.
2005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를 그린 50점의 그림을 발표하여, 사건이 예술가에게 준 분노와 충격을 표현했다. 보테로는 이 작품을 판매할 예정은 없지만, 대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미술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3. 3. 조각
1964년경, 보테로는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31]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청동 대신 아크릴 수지와 톱밥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1964년에 만든 ''작은 머리(주교)''는 매우 사실적으로 칠해졌지만, 재료가 너무 다공성이어서 이 방법을 포기했다.[32]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다시 조각에 열정적으로 매달렸고, 1977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그의 특징적인 청동 조각을 처음으로 전시했다.[31]1995년 6월 10일, 아들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가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으로 있을 때, 메데인의 산 안토니오 광장에 전시된 보테로의 청동 조각상 아래에 10kg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설치되었다. 이 폭발로 2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33] 보테로는 충격을 받고 훼손된 조각상을 "국가의 어리석음과 범죄 행위에 대한 기념물"로 그 자리에 남겨두고, 그 옆에 온전한 복제품을 기증했다.[34][35]
4. 주요 작품
보테로의 주요 작품은 크게 회화와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
회화에서는 1948년 그룹전을 통해 처음 작품을 선보였다. 초기에는 유럽 미술 사조와 20세기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52년 유럽으로 건너가 고야, 벨라스케스 등의 작품을 모사하며 실력을 쌓았다. 1953년에는 파리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1961년 뉴욕 현대 미술관이 그의 작품 ''열두 살의 모나리자''를 소장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보테로는 정물화와 풍경화도 그렸지만, 주로 상황 묘사를 통한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의 작품은 과장된 인물 표현, 즉 "뚱뚱한" 인물 묘사가 특징이다. 그는 "예술가는 이유 없이 특정한 형태에 끌린다"고 설명하며, 직관적인 형태를 추구하고 나중에 이를 합리화한다고 말했다. ''만돌린이 있는 정물''은 이러한 화풍이 시작된 작품으로, 작은 사운드홀을 통해 만돌린을 거대하게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강조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콜롬비아의 폭력 사태를 다룬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2005년)를 통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서커스'' 컬렉션을 전시했으며, 2010년 인터뷰에서는 정물로 돌아가 다른 주제를 다룰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조각은 1964년경부터 시작했다. 초기에는 아크릴 수지와 톱밥을 사용했으나, 재료의 문제로 포기했다.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조각 작업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77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청동 조각을 선보였다.
1995년에는 메데인의 산 안토니오 광장에 설치된 그의 조각상이 폭탄 테러로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2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보테로는 훼손된 조각상을 "국가의 어리석음과 범죄 행위에 대한 기념물"로 남겨두고, 그 옆에 온전한 복제품을 기증했다.[34][35]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제작 연도 |
---|---|
Via Crucis (Fernando Botero)|비아 크루시스프랑스어 | 2011년 |
로마 전사 | |
서커스 사람들 | 2008년 |
담배 피우는 여자 | |
재봉사들 | |
무용수들 | |
고양이와 함께 술 마시는 여자 | |
토테로 | |
오렌지 | |
출산 | 2006년 |
아부 그라이브 | 2005년 |
멜랑콜리 | 1989년 |
추기경 | 1998년 |
The Hand (Botero)|손영어 | 1994년 |
말을 탄 남자 | 1992년 |
Woman with Mirror|거울 앞의 여인영어 | 1987년 |
4. 1. 회화
보테로는 1948년, 다른 지역 출신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그룹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24] 1951년 보고타로 이주하기 전까지 세트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24] 젊은 시절, 예술적 관심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문 삽화가로도 일했으며, 마이애미 페레즈 미술관에는 그의 초기작 중 유럽 미술사조와 20세기 화가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과 정물화가 소장되어 있다.[25] 그의 첫 개인전은 보고타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갈레리아 레오 마티즈에서 열렸다.[26]1952년, 갤러리 수입으로 유럽으로 간 보테로는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로 이동했다.[27]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방문해 고야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했다.[28]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복사본을 팔기도 했다.[29]
1953년, 파리로 이주하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들을 연구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다.[24] 말년에는 주로 파리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1년에 한 달은 고향인 메데인에서 보냈다. 그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작품은 수백만 달러에 판매된다.[44] 1958년에는 제9회 콜롬비아 예술가 살롱에서 우승했다.[30]
2004년, 보테로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콜롬비아의 폭력 사태를 다룬 27점의 드로잉과 23점의 그림 시리즈를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되어 그곳에서 처음 전시되었다.[36]
2005년, 이라크 전쟁 중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군인들의 포로 학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는 유럽에서 처음 전시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비행기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85점 이상의 그림과 100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37][44] 이 시리즈는 2007년 워싱턴 D.C.를 포함한 두 곳의 미국에서 전시되었으며, 보테로는 이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고 박물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38] 2009년, 버클리 미술관 및 태평양 영화 보관소는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의 56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소장했으며, 이는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39]
2006년,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에 전념한 후, 보테로는 가족과 모성애와 같은 초기 삶의 주제로 돌아갔다. ''가족''[41]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자주 그려졌던 콜롬비아 가족을, ''모성''[42]에서는 2003년에 이미 그린 구성을 반복했다.[43]
2008년에는 20점의 유화와 수채화 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서커스'' 컬렉션을 전시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 보테로는 "결국, 나는 항상 가장 단순한 것, 정물로 돌아갑니다."라고 말하며 다른 주제를 다룰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44]
보테로의 작품은 정물화와 풍경화도 있지만, 상황 묘사를 통한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의 그림과 조각은 비례적으로 과장된, 즉 "뚱뚱한" 인물이라는 특징으로 통일된다.[44] 그는 이러한 인물들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예술가는 이유도 모른 채 특정한 형태에 끌린다. 당신은 직관적으로 입장을 취하고, 나중에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뿐이다."라고 설명했다.[45]
''만돌린이 있는 정물''은 확대된 인물을 그린 그의 화풍 발달의 시작을 알렸다.[46] 2000년 11월 인터뷰에서 그는 "만돌린을 그리고 있었는데, 사운드홀을 아주 작게 만들어서 만돌린이 거대하게 보이게 되었다. 세부 사항을 작게 만들면 형태가 기념비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그림 속 인물들의 눈, 입은 모두 작고 외부 형태는 거대하다."라고 말했다.[47]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보테로는 워싱턴 D.C.와 멕시코 시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그림을 거의 다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 그의 명성은 1961년 뉴욕 현대 미술관이 그의 그림, ''열두 살의 모나리자''를 소장한 후에 향상되었다.[46] 그는 1년에 단 한 달만 콜롬비아에서 보냈지만, 미술계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콜롬비아적인 예술가"로 여겼다.[44]
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Via Crucis (Fernando Botero)프랑스어 (2011년)
- 로마 전사
- 서커스 사람들 (2008년)
- 담배 피우는 여자
- 재봉사들
- 무용수들
- 고양이와 함께 술 마시는 여자
- 토테로
- 오렌지
- 출산 (2006년)
- 아부 그라이브 (2005년)
- 멜랑콜리 (1989년)
- 추기경 (1998년)
- The Hand (Botero)|label =손영어(1994년)
- Woman with Mirror|label =거울 앞의 여인영어(1987년)

4. 2. 조각
1964년경, 보테로는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청동으로 작업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 아크릴 수지와 톱밥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1964년에 만든 ''작은 머리(주교)''는 매우 사실적으로 칠해졌지만, 재료가 너무 다공성이어서 이 방법을 포기했다.[32]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조각에 "열정적으로" 다시 돌아왔고, 1977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그의 특징적인 청동 조각을 처음으로 선보였다.[31]1995년 6월 10일, 그의 아들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가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메데인의 산 안토니오 광장에 전시된 보테로의 청동 조각상 아래에 10kg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설치되어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2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33] 보테로는 훼손된 조각상을 "국가의 어리석음과 범죄 행위에 대한 기념물"로 그 자리에 남겨두고, 그 옆에 온전한 복제품을 기증했다.[34][35]
그의 조각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제작 연도 |
---|---|
Via Crucis (Fernando Botero)프랑스어 | 2011년 |
로마 전사 | |
서커스 사람들 | 2008년 |
담배 피우는 여자 | |
재봉사들 | |
무용수들 | |
고양이와 함께 술 마시는 여자 | |
토테로 | |
오렌지 | |
출산 | 2006년 |
아부 그라이브 | 2005년 |
멜랑콜리 | 1989년 |
추기경 | 1998년 |
The Hand (Botero)영어 | 1994년 |
말을 탄 남자 | 1992년 |
Woman with Mirror영어 | 1987년 |
5. 사회 참여 및 기부
2000년, 그는 개인 소장품 208점을 보테로 박물관에 기증했다.[3] 2004년 콜롬비아 내전과 2005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고 미술관에 기증했다.[3]
5. 1. 사회 참여
2004년, 페르난도 보테로는 1999년부터 2004년에 걸쳐 제작한 콜롬비아 내전의 장면을 그린 유화 23점과 데생 27점을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이 작품들은 5월 4일부터 6월 11일까지 공개되었다.[3]2005년에는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를 그린 50점의 그림을 발표하여, 사건이 예술가에게 준 분노와 충격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에서 공개되었으며, 2006년 10월에는 뉴욕에서도 전시되었다. 보테로는 이 작품을 판매할 예정은 없지만, 대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미술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3]
5. 2. 기부 활동
2000년, 보테로는 자신의 작품 123점과 샤갈, 피카소,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한 개인 소장품 85점을 보고타의 보테로 미술관에 기증했다.[48] 그는 메데인의 안티오키아 박물관에 119점을 기증했는데,[49] 여기에는 박물관 앞 광장에 설치된 청동 조각 23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광장은 보테로 광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0]2004년에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콜롬비아의 폭력 사태를 다룬 27점의 드로잉과 23점의 그림을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했다.[36]
이라크 전쟁 중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군인들의 포로 학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는 85점 이상의 그림과 100점의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테로는 이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고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38] 2009년, 버클리 미술관 및 태평양 영화 보관소는 ''아부 그라이브'' 시리즈의 56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39]
콜롬비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응답으로, 보테로는 협정의 서명과 비준을 기념하기 위해 조각한 ''평화의 비둘기(La paloma de la paz)''(2016)를 콜롬비아 정부에 기증했다.[51]
6.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보테로의 1964년작 교황 레오 10세(라파엘 이후)는 인터넷 밈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y tho"라는 캡션과 함께 사용된다.[59][60][61][6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23년 소설 "침묵을 바칩니다"는 보테로의 1979년작 "음악가들"을 표지 삽화로 사용했다.[23][63]
7. 전시회
2004년, 1999년부터 2004년에 걸쳐 콜롬비아 내전을 주제로 그린 유화 23점과 데생 27점을 콜롬비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고, 5월 4일부터 6월 11일까지 공개되었다.
2005년에는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를 다룬 50점의 그림을 발표하여 사건에 대한 분노와 충격을 표현했다. 이 작품들은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에서 전시되었고, 2006년 10월에는 뉴욕에서도 전시되었다. 보테로는 이 작품들을 판매하지 않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미술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2년에는 분카무라 더 뮤지엄(4월 29일~7월 23일), 나고야 시립 미술관(7월 16일~9월 25일), 교토 시립 교세라 미술관(10월 8일~12월 11일)에서 "보테로展 풍만한 마법"이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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